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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le Malt

Springbank_스프링뱅크-1/스프링뱅크의 역사

 SPRINGBANK 

-1828-

 

스프링뱅크 증류소는 스프링뱅크, 롱로우, 헤이즐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스프링뱅크와 함께 롱로우와 헤이즐번도 간단하게 알아볼게요

 

스프링뱅크는 스코틀랜드에서 생산 공정의 100%를 수행하는 유일한 증류소에요. 1828년부터 증류를 시작했고 가볍게 이탄 보리를 사용하여 독특한 2.5번의 증류 과정으로 복합적이고 풀바디한 스프링 뱅크 고유의 특성을 지닌 위스키를 생산하며 주력 위스키는 10, 12, 15, 18, 21년이 있습니다.

 

스프링뱅크는 현재 미첼Mitchell 가족의 5대째 손에 있습니다. 한때 세계 위스키의 수도라고 불리던 캠벨타운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조상들이 확립한 전통적인 생산 방법을 사용하고 있고, 위스키 제조 과정의 모든 단계에 손수 참여하기 때문에 거의 수제 위스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정의 100%가 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위스키 품질에 대한 탁월한 통제력 또한 스프링뱅크만의 특장점이에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 위치하는 캠벨타운의 위스키에 대한 공식 기록은 1591년부터 시작됩니다. 1601년 캠벨타운이 위스키 밀수 중심지가 되면서 위스키의 불법 생산이 만연하게 되요 그 좁은 지역에 최대 35개의 증류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1660년대에 미첼가족도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로우랜드에서 캠벨타운으로 이주를 하는데 일부 가족은 이미 몰트 마스터였어요. 

 

1825년 아치볼드 미첼 Archibald Mitchell은 리클라찬 Rieclachan Distillery의 파트너가 되었고 나중에 그의 형제인 휴 미첼 Hugh Mitchell도 합류하게 됩니다.

 

1828년 아치볼드 미첼은 가지고 있던 불법 부지를 사위인 윌리엄 리드 William Reid에게 넘겨 주면서 운영을 맡겼고 윌리엄 리드는 이곳에 스프링뱅크를 공식적으로 설립하고 합법적인 면허를 취득합니다. 이것이 캠벨타운에서 14번째로 허가된 증류소에요. 이 14개의 증류소 말고는 다 불법이였던 거죠.

 

1834년 캠벨타운 몰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아치볼드의 여동생 메리 미첼 Mary Mitchell은 드루모어 Drumore Distillery를 건설합니다.

 

1837년 윌리엄 리드가 운영하던 스프링뱅크에 재정적인 문제가 생기면서 아치볼드의 아들인 존 미첼 John Mitchell과 윌리엄 미첼 William Mitchell 형제가 스프링뱅크의 소유권을 갖게 되요. 이때부터 엄청난 성장을 보여주며 다음해인 1838년 킬마녹 Kilmarnock의 John Walker가 스프링뱅크 위스키의 급성장하는 프로필을 인식하고 118갤런을 구매합니다. 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조니 워커의 존 워커가 맞습니다. 유명한 사람이 사가면 또 입소문이 빠르게 퍼지잖아요?

 

 

이렇게 사업이 너무 잘되다 보니 1872년 존의 동생 윌리엄은 스프링뱅크에서 독립하고 글렌가일 Glengyle Distillery을 설립합니다. 동생이 나가고 혼자 남은 존은 아들인 알렉산더 미첼 Alexander Mitchell을 사업에 참여시켜 J&A Mitchell이라는 회사를 설립합니다.

 

1891년 당시 인구가 1,969명에 불과했던 캠벨타운은 1인당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유명했어요 하지만 곧 캠벨타운에 위기가 찾아와요.

1900년대 위스키의 트렌드가 바뀌면서 캠벨타운의 무겁고 진한 위스키보다 가볍고 산뜻한 위스키를 선호하게 되고 캠벨타운의 증류소들 역시 트렌드에 맞춰 만드는 방식을 바꿔 만들기 시작해요. 스프링뱅크 또한 이탄 대신 석탄을 사용하여 심하게 피트되지 않은 더 가벼운 위스키를 만듭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위스키 변화에 따라가지 못했던 일부 증류소들이 하나 둘 문을 닫게 되고 이로 인해 블렌디드 업체들도 캠벨타운에 등을 돌리는데 이때 주목됬던 지역이 스페이사이드에요. 스페이사이드가 가볍고 산뜻한 위스키를 더 잘 만들었거든요. 1919년에 미국 금주령까지 터지면서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윌리엄 미첼의 글렌가일 증류소도 1925년 다른 회사에 매각된 후 거래를 중단하고, 1926년 스프링뱅크 또한 문을 닫게 됩니다. 그리고 1933년에 다시 문을 열어요 재오픈을 한것도 대단한 것이 다시 일어설 힘도 없이 주저 앉은 증류소들이 대부분이였거든요.

1934년 아치볼드 미첼의 리클라찬 증류소 또한 문을 닫게 됩니다.

 

 

결국 최대 35개의 증류소가 있던 캠벨타운에 단 두개의 증류소만 남게 되는데 그것이 스프링 뱅크와 글렌 스코샤 Glen Scotia 증류소에요.

 

1970년 스프링뱅크는 1919년에 증류된 50년 된 위스키를 병입합니다. 이것은 2013년 중국 위스키 수집가에게 5만 파운드에 한병을 판매하게 되요

 

1973년 스프링뱅크는 롱로우를 증류하면서 캠벨타운에서 Islay스타일의 싱글 몰트를 생산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1980년대 위스키 산업의 침체는 스코틀랜드 전역에 걸쳐 증류소들이 문을 닫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스프링 뱅크는 어렵지만 계속 위스키를 판매하면서 증류소를 지켰고, 1989년 드디어 위스키 수요가 증가하면서 스프링뱅크에서 정기적인 생산이 재개됩니다. 

스프링뱅크는 캠벨타운의 전통적인 생산 방식을 고수하면서 1992년에는 100% Floor Malting으로 바꾸고 보리부터 병입까지 위스키 생산의 모든 과정을 한 장소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수행하는 증류소가 됩니다.

 

1997년에는 스프링뱅크에서 헤이즐번 Hazelburn의 첫 번째 증류를 해요. 헤이즐번과 롱로우는 캠벨타운에 있던 사라진 증류소의 이름을 따온거라고 합니다.

 

2000년에는 현재 스프링뱅크의 회장이자 아치볼드 미첼의 증손자인 헤들리 라이트 Hedley G. Wright가 글렌가일 증류소 건물을 매입하여 글렌가일을 다시 미첼 가문의 손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2004년 재건된 글렌가일은 100년만에 캠벨타운에 새로 지어진 증류소이자 21세기에 스코틀랜드에서 건설된 최초의 증류소로 운영되고 있어요.

 

2008년 주가 상승과 생산 원가 폭등으로 인해 스프링뱅크는 새로운 창고를 짓기 위해 6개월동안 생산을 중단하고 2009년에 위스키 제조 공정을 재개합니다.

 

현재 스프링뱅크는 캠벨타운에서 운영되는 단 3개의 증류소 중 하나이며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 가족 소유 증류소에요.

 

이렇게 스프링뱅크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거의 캠벨타운의 위스키 역사를 한몸에 담고 있네요.

다음 편에는 스프링뱅크 2.5회 증류에 대한 이야기와 롱로우, 헤이즐번의 노트를 하나하나 살펴볼게요.

글렌가일도 빼놓을 수 없으니 글렌가일은 이후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